동해안여행기(10) - 통도사를 탐방하다
해동용궁사부터 젖병등대와 죽성드림성당을 동해안 따라 오면서 본 후에
양산 통도사를 가게 된다 불보사찰인 통도사를 탐방하는것도 좋지만
지금쯤 홍매화를 잘 볼수 있으리라 하는 설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거진 송림과 개울을 따라 가니 통도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통도사(通道寺)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축산통도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선다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통도사는 우리나라 3보사찰중 불보사찰이다
"영축산통도사"라는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며 기둥 좌우의
"國之大刹 佛之宗家" 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 법보사찰 - 해인사, 승보사찰 - 송광사
일주문과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연등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배치 되어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범종루, 극락보전, 만세루, 약사전, 불이문에 이르기까지가 하로전에 속한다
그 중심은 영산전이라 한다
불이문에서 관음전에 이르기까지가 중로전
그리고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는곳을 상로전(上爐殿)이라 한다
* 가람 배치도
시선이 자꾸만 가는것은 홍매화였다
홍매화가 곱게 피어 있는 모습과 그 모습을 담을려는 진사님과 관광객이
그 주변에 많이들 운집 해 있었다
나는 통도사를 관람한 후에 홍매화를 자세히 보기로 한다
만세루(萬歲樓, 경남유형문화재 제193호)
만세루는 법회나 법요식등 사찰의 주요행사에 사용하던 누각이다
지금의 건물은 1746년(영조22)에 영숙대사가 다시 지은것으로 전해진다
영산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경내 가운데 있었다
삼층석탑(보물1471호)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이룬 일반형 석탑이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기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각층 4단씩이다
기단부의 안상(眼象) 또는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말,고려초의 탑으로 추정된다
약사전(藥師殿, 경남유형문화재 제197호)
정면3칸 측면단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로 내부에는 중생의 병을
구제해 주는 약사여래상이 봉안 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1826호)
하로전의 중심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석가여래의 일생을 여덟 가지 중요한 사실들로
정리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탱화가 봉안 되어있다
또 내부의 벽에는 다보탑과 석씨원류응화사적도, 운룡도등의 벽화가
그러져 있는데 이들 모두 보물 제1711호로 지정 되어있다
영각 앞에는 350년 된 홍매화가 있다
그 꽃을 담을려는 진사님이나 일반 관광객들이 홍매화를 즐기면서
사진 담기에 열중이였다
봉발탑(奉鉢塔, 보물 제471호)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법을 전함에게는 그 표시로 게송을 지어준다든지
또는 가사나 빌우를 전하는데 부처님의 의발(衣鉢)을 56억7천만 년 뒤에
출현할 용화전의 주불인 미륵불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이다
용화전(龍華殿, 경남유형문화재 제204호)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법당 내부에는 56억7천만 년 후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이 2m 크기의 좌상으로 봉안되어 있다
이제 대웅전 옆 금강계단에 이른다
신발을 벗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신 금강계단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안내하시는 보살님이 사진은 못 담게 한다
돌면서 멈추고는 잠시 기도를 드린다
" 자비로우신 부처님이시여,
오늘 저희 부부는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보잘것없는 한갖 미물인 저를 좀 더 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 하여 주옵쇼서 "
금강계단(金剛戒壇)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스님께서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이 후 스님은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울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 통도사 홈페이지에서 )
* 홈페이지에서 퍼온 금강계단 모습
금강계단을 한바퀴 돌면서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린후에 대웅전 서편으로 나오게 된다
그곳에는 구룡지가 있었다
조그마한 연못에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의 돌기둥에는
" 천장비계자장득시역문수부촉래(天藏秘界慈藏得是亦文殊付囑來) " 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구룡지(九龍池)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 통도사 홈페이지에서 )
대웅전은 동서남북 각기 편액이 다르다
정면인 남쪽은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大方廣殿, 북쪽은 寂滅寶宮이라 했다
영축산의 정상이 보인다
삼보사찰중 불보사찰에 속하는 통도사는 우리나라의 가람중에
중심이라 할 만 했다
명부전(冥府殿, 경남유형문화재 제195호)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다포식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법당 중앙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각각 다섯분씩 시왕탱을 봉안하였다
통도사는 정말 몇 번을 관람했어도 아름다운 사찰이며 유서깊은 사찰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더 자세히 볼려면 하루 종일 봐도 부족 할것 같았다
이제 영각 앞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곳에는 그 토록 보고싶었던 홍매화가 있기 때문이다
좀 늦게 왔어 어떤 모습으로 반겨 줄지 궁금했다
이곳 홍매화는 블로그에서 여러번 봤다
특히나 아젤리아님은 세번씩이나 단녀 갔다고 한다
그런 열정이 있어야하는데 늦게 찾아 온 윤슬에게는 매화가 반겨 줄련지 ......
천년고찰이며 불보사찰인 통도사는 관람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금강계단에서는 숙연해 지기도 했다
좀 더 자세히 봐야하는데 이번에도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이제 홍매화를 만나고는 또 다른 여행지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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