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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강원

[ 영월/봉화/영주 여행기 1 ] - 단종의 恨이 서린 유형의 땅 영월 청령포를 가다

 

 

 

 

 

 

 

 

 

"  영월,봉화,영주여행기  1 -  단종의 恨이 서린 유형의 땅 영월 청령포를 가다   "

(  2017. 10 . 30. 월  )

 

 

오래전부터 갈려고 벼루었던 영월과 봉화 여행을 이제사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영월은 단종대왕의 유배지인 청령포가 있고 장릉이 있으며

선돌과 한반도지형이 있는 곳이기에 더욱 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제사 가게 된다

먼저 간 곳은 청령포(淸泠浦)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청령포가 한눈에도 유배지로써는 천연의 지형 임을 알게 된다

물돌이로 삼면은 西江이 흐르고 뒷편 서쪽은  험준한 육육봉 암벽의 산이였으니

이 곳에 어린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고 유배생활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뱃머리에 오르게 된다

 

 

* 영월, 봉화, 영주 여행일정 ( 2017. 10. 30 ~ 11. 1 )

 

영월 : 청령포 - 장 릉 - 선 돌 - 한반도지형 - 요선정

     봉화 : 각화사 - 석천정사 - 청암정 - (추원재,삼계서원)  

- 북지리마애여래좌상 - 축서사      

영주 : 무섬마을 - 부석사 - 소수서원                   

 

 

 

 

 

배는 잠시만에 서강을 건너준다  ( 왕복 승선료 3,000원 )

서강은 굽이굽이 흐르지만 지금은 강물이 많지는 않았다

울창한 송림이 보이고 아무래도 그 속에 단종어소가 있으리라 믿어진다

 

 

 

 

단종어소 가기전에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청령포에 대해 설명 해 두었다

 

청령포(淸泠浦, 명승제50호)

이곳은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1457년(세조3)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처음으로 유배(流配) 되었던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서강)로 둘려싸여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다

단종은 1457년6월28일부터 두달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그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觀風軒으로 옮겨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726년(영조2)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1763년(영조39) 9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 단묘재본부시유지 " 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2000년 4월에는 단종이 거쳐 하던곳에 정면5칸, 측면2칸반 규모의 겹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부속 건물로 정면5칸 측면1칸반의 규모로

홑치마에 우진각 지붕 형식의 초가집 행랑채를 건립하였다

(안내문)

 

 

 

 

 

 

나는 청령포의 안내도를 보고는 먼저 단종어소부터 들리고 관음송, 노산대, 망향탑과 전망대

그리고 나오면서 단종어소를 한번 더 보고 금표비를 보게 되었다

 

* 순서 : 단종어소 - 관음송 - 노산대 - 망향탑 - 전망대 - 금표비

 

 

 

 

 

 

 

 

 

 

단종어소는 울창한 송림사이에 있었다

비운의 단종이기에 또한 그 역사를 익히 알기에 어소에 가까울수록에

가슴을 억눌리는 감정을 겨우 자제하게 된다

 

 

 

 

 

먼저 단종어소부터 들리게 된다

 

단종어소(端宗御所)

단종어소는 승정원 일기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어소에는 당시의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랍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소 담장안에는 단종유지비각이 위치 해있다

 

 

 

 

 

 

 

 

 

 

 

 

 

 

 

 

 

 

 

 

 

 

 

 

 

 

 

 

 

 

 

 

여기서 단종대왕에 대해 두산백과를 통해 자세히 기록 해 본다

 

단종(端宗, 조선 제6대임금)

 

이름 홍위(). 문종()의 아들.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

 비()는 돈령부판사() 송현수()의 딸인 정순왕후().

1448년(세종 30)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세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한편 집현전(殿)의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도

 좌우협찬()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 ·권람()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0월에 영월에서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의 6명을 사육신()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분개하여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김시습() 등 6명을 생육신()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되어서 대군()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이다.

 

 

 

관노나 궁녀가 기거하던 행랑채

 

 

 

 

 

 

단종어소 앞에는 비각이 있었고 그 안에는 비가 있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이곳은 1457년 6월22일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降封, 유배되어 계셨던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처인 御所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39년(1763)에 이 碑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전하고 있다

비는 162cm 높이로 1단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안내문)

 

 

 

 

담장을 넘은 소나무 한그루는 단종에게 절이라도 하는듯 어소쪽으로 굽어 있었다 

 

 

 

 

 

 

 

 

 

 

 

 

 

 

 

 

 

 

 

 

밀랍인형으로 만든 단종이지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어소를 떠나 관음송으로 가게 된다

 

 

 

 

 

 

어소를 나와 송림 사이로 가니 거대한 소나무가 있었다

아래부터 두가지인 소나무는 바로 관음송이다

 

영월청령포관음송( 寧越淸泠浦觀音松, 천연기념물제349호)

이 소나무는 높이 3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5m이며 지상 1.2m 높이에서

두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3.3m와 2.95m이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때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오고 있어서

약600년 정도로 추정 하고있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는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였다하여

볼 관(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 하여 관음송이라 불리게 되었다

( 안내문 )

 

한 동안 관음송을 우러러 보게 된다

두 가지사이에 앉아 있는 단종임금의 모습도 나름대로 그려본다

얼마나 적적했고 고독하셨을까 하는 애달픈 생각을 가지면서 노산대로 가게 된다

 

 

 

 

 

 

 

 

 

 

 

노산대에 올라 주변을 바라본다

암벽의 육육봉이 우뚝 솟아 있었고  산 아래는 서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 ~~~ 이런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셨으니 ......

 

 

 

 

노산대의 바위 위에서 청령포의 험준한 산세와 서강을 보고는

왕위를 찬탈하고 세상에 못 나오게 하기 위해 이런곳에 유배생활을 하도록 한

수양이며 한명회, 권람등의 역적들이 저주 스럽고 울분을 참을수 없었다

노산대에서 조금 더 오르니 망향탑이 있었다 

 

망향탑(望鄕塔)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할때 이곳에 올라 한양땅에 있을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면서 쌓았다는 탑으로 

그 당시 애절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려 보게 된다 

단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망향탑과 전망대를 거쳐 다시 어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유배생활 하는것으로 끝나지 않고, 복위를 도모한 금성대군을 위시해 결국

단종을 죽게하는 수양대군, 그리고 역적들이 너무도 저주 스럽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임금이 되었으나 강봉되어 유배되고 그것도 모자라 죽음을

당했던 단종대왕은 조선조 아니라 전 역사상 가장 비운의 임금이였음에

가슴이 메여지고  눈시울이 뜨겁게 된다

 

 

 

 

청령포를 떠나기전에 금표비를 보게 된다

 

금표비(禁標碑)

금표비는 단종께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2년(1726)에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 "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赤在當禁 崇禎九十九年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 숭정구십구년)

이라 음각 되어 있었다 

이 뜻은 "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99년 " 이라는 내용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같은 제약이 있었을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금표비를 본 후에 다시 한번 단종어소를 들려 비록 밀랍인형이지만

단종의 용안을 한번 더 우러러 보고는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단종을 다시 생각케 된다 

단종은 어린 시절 자기를 업어주던 할아버지 세종의 인자한 모습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기고 요절한 아버지 문종 얼굴이 떠 올랐을것이고

자신을 낳고 3일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며 왕위 복위를 위해 충정을 다한 사육신과

금성대군 숙부 그리고 생이별을 한 아내 정순왕후의 비통한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을것이다

 

 

 

 

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서강을 바라보며

뜻 있는 이들이면 단종을 생각하면 모두 눈물을 뿌리게 될 청령포를 다시금 바라본다

그리고는 다시 배에 오르게 된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역사는 말해준다

숙종조와 영조에 이르게 되어 단종은 다시 복위가 되어 오늘날 대왕으로 칭하고

세조는 세조라기보다는 수양으로 더 통해져 있음은

왕위를 찬탈하고 끝내 조카를 죽게 하는 권세욕에 눈이 먼 왕이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꿈에 현덕왕후가 얼굴에 침을 뱉어 내내 피부병으로 평생을 고생 하였다

그래서 속리산 목욕소에서 목욕을 했다는 그리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참회를 했다고 하지만

그는 역사속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게 한 기록은 영원히 남아 있을것이다

 

 

 

 

 

 

홍수로 인해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은 이어진다

그해(1457) 10월에 다시 금성대군의 복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니 결국 사약을 받고 목숨을 거두게 된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떠 다니게 되고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다

 

 

 

 

 

청령포 강건너 나루의 옆에는 단종의 유배길과 사형길에 금부도사로 왔던 왕방연의 시비가 서 있었다

그는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왕방연의 심정을 담은 그의 시

< 회단종이작시조(懷端宗而作時調)>는 비석에 이렇게 남아 있다

 

千里遠遠道    천만리 머나먼길에     

美人別離秋    고운님 여의옵고        

此心未所若    내마음 둘데 없어      

下馬臨川流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저물도 내 안과 같아서

鳴咽去不休   울면서 밤길을 가더라 

 

 

 

 

배에 올랐어도 내내 청령포를 바라보게 된다

유배의 천연적인 땅, 청령포는 단종의 恨이 서려있기에 보는 내내

울적하였으며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청령포, 처음 발걸음을 함을 마치 죄인처럼 느끼게 된다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한 그곳엔 단종의 애통함과 한이 묻혀있는곳이다

얼마나 고독하며 님에 대한 그리움에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하는  생각에

오열을 하면서 청령포를 떠나 단종의 능인 장릉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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