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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충청

추사 김정희고택을 방문하면서 3년전 제주도 추사 유배지를 들린 추억을 더듬게 된다











"  추사 김정희고택을 방문하면서 3년전 제주도 추사유배지를

들린 추억을 더듬게 된다  "

(  2016. 11. 25  )


추사 김정희선생을 흠모하는 나는 3년전 제주도 여행시에

9년간 유배생활을 한 유배지와 유배길을 보고 걷게 된 적이 있었다

오늘은 예산에 있는 김정희생가고택을 찾게 된다

고택과 그 주변을 보니 김정희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포스팅은 어느때보다 정성을 드리게 된다  


* 추사김정희고택방문순서 : 

고택 - 월성위김한신묘 - 화순옹주열녀문 - 백송공원

- 우물 - 관리사 - 김정희묘 - 추사기념관 - 용궁리백송  





집에서(세종시) 한시간 소요하니 목적지 고택에 당도하게 된다

고택을 들어서기 전에 3년전 제주도 여행시에 추사선생의 유배지와

주변 유배길을 갔던 추억을 더듬게 된다


추사 유배길을 추사김정희선생에게 길을 묻다   http://blog.daum.net/skh7678/728

추사 선생 유배길제3코스(사색의길) 안덕계곡을 가다  http://blog.daum.net/skh7678/729


입장료는 무료였다   먼저 고택으로 들어서게 된다


김정희선생 고택( 金正喜先生故宅, 충남유형문화재제43호)       

                            

오석산 선영아래 있는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서울과 이곳에 저택을 하사 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한다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때 주로 지냈던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머문곳이다 



 


대문을 들어서게 된다

넓은 마당은 말끔했다  고택의 사랑채를 먼저 만나게 된다

그럼 여기서 김정희선생에 대해 안내문에 있는것을 인용해 본다 


추사 김정희 선생


추사김정희선생은 1786년6월3일 충남예산군신암면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정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에

10여년간 유배 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말년에 생부(백부 김노경에게 입양) 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71세에 작고 했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經學, 金石學

文字學, 史學, 地理學, 天文學에 이르기까지 博通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예당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등이 있다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詩, 書, 畵, 篆刻(전각)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는 추사체라는 獨自一門을 열어 서예 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 묵죽도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등이 있다 

( 안내문 )


안내문을 먼저 보고는 고택을 자세히 둘러보게 된다



 


사랑채 알뜰에는 목단이 있었고 그 앞에 사각 돌기둥이 있었다 그것은 해시계였다

해시계 :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이 네모난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앞면에 새겨진 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것이다






사랑채 방은 들어가지 못해 열려진 문을 통해 보게 된다

당시 쓰던 가구며 방석등이 있었다





사랑채 :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한칸, 동쪽에 두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구조이다












사랑채를 본 후에 안채로 가게 된다

사진은  안채(좌), 사랑채(우)의 사이이다





안 채 :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너방, 부엌, 광등을 갖추고 있다

대청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특이한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 주택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채도 그렇지만 안채 곳곳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가 벽에 걸려 있었다

무량수(無量壽) :  " 한없는 수명 "이란 뜻으로 불교의 윤회설에 입각하여 쓴글이다 

왼편의 승련노인은 추사선생의 號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본 후에 뒷 마당으로 나오게 된다

잎이 모두 떨어진 감나무에는 붉게 익은 감만이 달려 있었다

늦가을의 정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안채 뒷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게 된다 이곳은 영당(사당)이다


영당(影堂) :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현판 " 추사영실 " 은 김정희의 벗 <권돈인>이 썼다


* 관리사무소에는 해시계에는 아들 감상우라 표기 되었고

이곳 영당에는 김상무라 되어 있다  바르게 표기 해야 함을 알려 드린다





영당에는 김정희선생의 초상화가 있었다 ( 빛에 의해 사진이 ㅜㅜ )

초상화는 선생의 제자인 <이한철>이 그렸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 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현판 추사영실 (秋史影室)은 선생의 벗인 <권돈인>이 쓴것이다






영당 앞에서 본 사랑채와 안채의 뒷 마당이다

감나무가 이곳에도 몇 주가 있어 감을 볼수 있었다





사랑채 뒷마당에서 바라본 영당과 안채 뒷 모습이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오게 된다

아름다운 고택이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것은 고택 자체가 아름다운것도 있지만 

그 보다 추사 선생님의 고결한 인품과 특별한 서예와 그 밖의 예술의 경지를

느끼기에 더욱 아름답게 여겨지게 된다





고택을 나와 월성위 김한신묘가 있는곳으로 가게 된다


월성위김한신묘(月城尉金漢藎墓, 충남문화재자료 제189호)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이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재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그러나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오위도총관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써서 시책문을 많이 썼으며 전각에도 뛰어났다

영조대왕이 각별히 총애 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비문에는 영조대왕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월성위 김한신묘 바로 옆으로 가게 된다

그곳은 화순옹주의 열녀문이 있었다


화순옹주 정려문(和順翁主 旌閭門)

정려문(旌閭門)은 추사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차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烈女門이다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을 따르고 말았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명정하였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 안내문 ) 





정려문 안에는 주춧돌만이 있었다






정려문 바로 옆에 있는 백송(白松) 공원을 들리게 된다

백송은 희귀한 소나무이다 이곳엔 추사 김정희선생의

정신과 작품을 소재로한 조각품을 전시해 두었다  어린 백송과 함께.......


 
















백송공원에서 본 화순옹주의 정려문 안쪽 모습이다





다시 고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으로 가면 추사 묘가 있고 기념관이 있기 때문이다

고택 뒷편 담장에는 단풍이 아직도 남아 있어 나와 눈맞춤을 하게 된다

붉고 노랑 단풍은 담장 안에 있는 감과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지막 단풍이길래 한 동안 바라보다 고택 옆으로 가니 우물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사용한 우물이란다





관리사 건물 앞도 지나게 된다

이곳은 관리인이 사는지라 입장을 못하게 했다





우물을 지나 김정희선생의 묘를 참배하게 된다


김정희 묘(충남문화재자료 제188호)

김정희와 첫째부인 한산이씨, 둘째부인 예안이씨 세분이 함께 묻힌 합장 묘이다

비문은 1937년 후손인 김승렬이 짓고 새겼다고 한다


참배한후에 추사기념관을 들려본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생애와 그의 작품이 전시 되어 있었다

소중한 자료였다   사진은 삼가해서 담지 않았다

단지 세한도는 전 기록으로 대신해 본다





세한도(歲寒圖, 국보제180호)

세한도는 1844년 완당 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제자인 이상적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에 최고의 명작이다





기념관을 나오게 된다

넓은 잔디밭 저 편에는 고택과 관리사가 보이고 선생의 묘가 보인다

아직 못 본것은 선생이 연경에서 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을 찾아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백송은 조금 떨어져 있는곳에 있기에 가면서 3년전 제주도 유배지를 방문한 추억을 되새겨 본다


유배지엔 초가인 초라한 집이였다

선생은 그곳에서도 후학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 그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0개의 벼루와 1000자루의 붓을 달아가면서 글을 쓰고 지었다고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선생의 체취를, 족적을 느껴 볼려고 유배길도 걷게 되었다

길은 세가지인데 집념의 길, 인연의 길, 그리고 사색의 길이다

그중 단산을 오르면서 집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날이 어두워져 다음날

사색의 길인 안덕계곡을 걷기도 했다


"  하늘이여,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  "


이렇게 自問을 하면서 진리를 깨닫고 깊은 思索을 했다고 한다





이제 백송이 있는곳에 당도하게 된다

이곳은 선생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가 있었고 그 앞에 백송이 있었다






백송( 白松, 천연기념물제106호)

이 백송은 김정희가 25세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 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영의정을 지낸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고 한다

백송은 자람이 느리고 자랄수록 껍질이 흰빛깔을 드러내 보이고 잎이 세가지이다

베이징이 원산지이며 이조때 사신이 귀국시에 가져와 심었는데 

전국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희귀 소나무이다  

( 일반소나무 2잎, 잣나무 5잎 )


백송을 봄으로써 김정희고택을 떠나게 된다






예산 김정희고택은 평소 오고 싶었던곳인데 오늘에사 들리게 되면서

좀 더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봄철에 다시 찾을것을 다짐도 하고

제주 귀양후에 생을 마감할때까지 머문 선친의 묘가 있는 과천에도

한번 방문해서 선생을 다시 만나보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