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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경상

야은 길재선생을 기리는 채미정을 들리게 된다










나의 여행기 - 구미 채미정

( 2016. 5. 25 )


금오산 산행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채미정을 찾게 된다

고려말 충신 三隱(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중 한사람인

야은 길재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채미정이다



채미정(採薇亭) 


채미정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이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채미정은 흥기문을 지나 우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가 있는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 백과사전 )






금오지로 흐르는 하천에는 돌로 만든 다리를 건너니

채비정의 입구인 흥기문(興起門)이 나온다





冶隱 吉再선생하면 먼저 회고가가 연상케 된다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경을 둘러보며 고려 왕조에 대한

애틋한 정과 인생무상을 감상적으로 노래한 회고가를 .....



회고가(懷古歌)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흥기문으로 들어와  먼저 좌측부터 관람하게 된다

구인제(求仁薺)이다

길재선생 후학들의 강학 공간으로 어짐을 구한다는 뜻이 있다

목재면에 칠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살렸는데 꾸밈이 없고 절개있는

선비의 정신을 표현하는것이다





채미정을 보게 된다

채미정의 '채미(採薇)'란 고사리를 캔다는 의미인데

중국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자 "백이" "숙제"는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연명하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채미정이란 바로 길재선생의 충절이 백이.숙제를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이다


채미정에는 벽이 없고  열개문이 설치되어 문만 열어 올리면

전체가 마루가 되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구인제 뒷편으로 가게 된다











경모각이 보인다





경모각에는 숙종이 야은 길재선생의 절의를 찬양하는 오언시의 어필을 남겼다


歸臥烏山下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       청아한 기풍은 엄광과 비견 할만하네

聖王成其美       성주께서 아름다움 이루게 하셔   

          勸人節義興       모든 사람에게 절의를 일으키려 하심일세

















경모각을 본 후에 비각에 오게 된다

비각에는 유허비가 있었다  





고려문하주서 야은길선생유허비 

유허비는 그렇게 되어 있었고 처음 비는 알수 없고

1694년(숙종30년) 선산도호부사 김만증이 새로 갈아 세운것이 오늘에 이른다





구인제와 채미정 사이로 오늘 내가 다녀온 금오산이 보인다

현월봉에 언제 다시 오를수 있으랴






경모각과 비각을 본 후에 다시 구인제와 채미정을

 둘러보고는 흥기문을 나서게 된다












야은 길재선생의 충절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집으로 오게 된다

금오산 산행을 하고 채미정까지 보는 보람찬 하루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