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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서울·경기

정조의 효심을 읽게 하는 화성행궁을 탐방하게 된다








세계유산탐방기(2) - 화성행궁

( 2016. 3. 13 )


지난 3월11일은 동구릉을 찾았고 오늘은 융.건릉을 탐방 할려다

시간이 촉박하여 화성행궁을 탐방하게 된다

화성은 여러 차례 산책하면서 봐 왔지만 화성행궁은 아직 관람하지 못 한지라

오늘에사 그 뜻을 이루게 된다



화성행궁(華城行宮)


사적 제478호.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꺽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 백과사전에서 )






* 화성행궁 배치도





신풍루(화성행궁의 정문)를 들어서니 우측에 오래된 고목이 눈길을 잡는다

화성행궁 안에는 수령이 6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인 노거수가 있다

수원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로 예로부터 신목, 영목으로 불려 왔으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의 노여움을 사 어려움을 닥치는 반면

소원지에다 소원을 적어서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원지가 많이도 걸려 있었다





신풍루에서 입장 한후에 처음 만나는 문은 좌익문이다

좌익문은 중앙문 앞에 있으며

"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 " 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이다





좌익문을 들어서니 중양문이 있었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이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正殿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 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 萬年의 壽를 받들어 빈다 " 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수당 내부











봉수당에서의 진찬연(進饌宴)

봉수당에는 1795년 을묘원행시 진찬연 장면을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있고

여관(女官)들은 왕과 혜경궁홍씨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 연출하는 장면을 봉수당에 만들어 두었으나 사진을 잘 담을수가 없었다






















글 읽는 환관 :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서책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단장하는 상궁 :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에 연결된 행각으로 단장하고 있는 상궁의 모습이다





복내당 : 화성행궁의 내당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는곳이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년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장락당과 봉수당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 을미원행 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때 파괴 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 되었다























노래당 :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은 건물이다

















이제 조금 떨어져 있는 화령전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을 봉인하기 위해 만든 어진 봉안각이다

정조대왕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입은 초상화를 모셨다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한것이다










운한각(雲漢閣)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인한 건물이다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이다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한것이다



정조(正祖)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이다.

"첫돌이 되었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라고 할 만큼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다.

1762년(영조 38), 정조의 나이 11세 때 생부인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정조는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이성을 잃은 영조는 물론이고 집권 세력인 노론들은 그런 정조를 외면했다.

사도세자가 죽자 정조는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잊지 않았다





신연(神輦)

신연이란 국왕의 장례시에 신백(神帛)을 모시고 가는 연이다

화령전의 신연은 사도세자가 묻혀 계신 형륭원 재실에 봉안 되었던

정조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것이다

















화령전을 나서면서 본 서장대(화성장대)가 가장 높은곳에 보인다

재작년인가 산우님 몇 분과 이곳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었다





제정(祭井)

제정은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 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禦井이라고 한다


화령전에서 다시 봉수당으로 오게 된다

















낙남헌(洛南軒, 경기도기념물제65호)

낙남헌은 각종 행사를 진행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화성행궁 부속건물중에서 파괴 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유여택 : 정조대왕이 행차중 잠시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던곳이다











외정리소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의 행차시 화성행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모습이다












신풍루(新豊樓) :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이란 " 국왕의 새로운 고향 " 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 사랑을 보여준다



신풍루를 나서면서 화성행궁을 자세히 보게 됨에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화성행궁을 나서면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더욱 느끼게 되며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이 있는 융.건릉을 그리고 용주사 사찰도 보리라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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