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함께하는 지인 부부와 함께 금산으로 가게 된다 ( 2019. 2. 23 )
금산 추부면에 일이 있어 갔다가 금산에서 유명한 사찰 *보석사를 찾게 된다
날씨는 미세먼지가 조금있다고는 하지만 청명하고 봄이 온 듯 따사롭다
진악산 아래 있는 보석사는 고즈넉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찰 경내를 거닐면서 사색에 젖기도 한다
보석사(寶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尋劒堂)·산신각·응향각(凝香閣)·체실(體室)·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진영각은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나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먼저 *대웅전을 보게 된다
보석사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제143호)
신라헌강왕11년(885)에 조구선사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시에 불타 없어진것을 조선 고종19년(1882)에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충남유형문화재제214호) " 이 있다
사찰은 크진 않았지만 아늑했다
오후의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이제 보석사의 명물인 은행나무를 찾아 걸음을 옮겨 본다
경내에서 계단을 내려서니 목조로 된 아치형의 다리가 개울 위를 건너게 해 준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크게 놀라게 된다
거대한 *은행나무는 이미 산 아래인지라 어둠이 깔린체 우뚝 서 있었다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제365호)
보석사의 입구에 서 있으며 높이 40m, 흉고둘레10.4m로 나무의 수령이 1,000년 이상이 된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당시(885년)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은행나무는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큰 일이 있을때에는 소리내어 울음으로써
재난에 대비하도록 알려주는 마을의 수호신이라 전해진다
은행나무를 한 동안 바라본다
그 웅대함에 놀랍다 용문사 앞 은행나무와 영동 영국사 앞 은행나무와 흡사했다
또한 잘 자라 아름드리 된 전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스님께서 알려주신 의병승장비를 보려 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자리한 *의병승장비는 펜스가 쳐져 있었고
비각 아래에 있어 자세히는 사진을 담을수가 없었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의병승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로서 1840년(헌종6년)에 보석사 입구에 건립 되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우의정 조인영이며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 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가 썼음을 기록하였다
진악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는 절 이름대로 금산의 보석 같았다
천년고찰이기도 하지만 천년된 은행나무가 있어 더욱 유구한 역사를 짐작 할수 있었다
은행나무에 단풍이 노랗게 들적에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귀가길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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