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나의 글

** 左袒을 한 조광조는 결국 逆鱗을 ..... **

 

 

                 左袒을 한 조광조는  결국  逆鱗을 .....

 

 

 

           春來不似春 ~~~

 

           봄을 재촉하는 비는 긴 종일 내리고 있다

           그로 인해  온통 세상은  안개 속에 묻혀 버린체.......

           차라리  가뭄이  해갈 되도록  좀 시원하게  장대비라도 내렸으면 하는 기대도

           해 보지만  이런 날씨는  게으른 사람  낮잠 자기에 좋을성 싶다

           어째 되었던 봄은 멀지않아  올 것이다

           삼라만상이  소생하고 새 잎이 나고,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춘삼월 호시절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비록 나 뿐만 아니고 우리나라 모든 이들은  아니 전세계인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인해 마음이 우울하고 피부에 닿는 실물 경제에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심적으론 봄을 맞이 못하고 있으니

           바로  춘래불사춘이 아니고 무엇이랴 ?

           나는  靜庵  趙光祖가 생각 난다

           개혁을 하여 이상적인 왕정정치를  이룩하려던 조광조는  따스한 봄철을 그리워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암 조광조는 개혁을 서두러고

 

           조광조는  20세에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써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했고  < 呂氏鄕約 >을

           반포. 간행하여 조선 8도에 시행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를 꾀했으며

           중종에게  " 현량과 "의 과거제도를 두게하여 젊은 소장학자를 발탁하여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훈구세력을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반정공신의 훈작을 삭탈 할것을

           왕에게  요청하니 훈구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左袒을

 

          도학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치로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하여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사림파 대신을 모아두고  좌단 (註) 을 하게 된다

 

            註 :  중국 史記에 나오는  고사성어 로써

               한나라 高祖 劉邦이 죽은후  황후인 呂太后가 권력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고 여태후가 죽은후에도

               여씨 일족이 계속 권력을 쥐자 이에 반발한 우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은 상장군을 회수하고

               상장군이 된 주발이  북군의 병사를  모아놓고

               "  원래  漢室의 주인은 유씨이다. 불행이도 여씨가  무엄하게도 권력을 계속 장악하고 있으니

                  나는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웃옷의  오른쪽 어깨를

                  벗고 ( 右袒) ,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 하려는자는  좌측 어깨를 벗으라 ( 左袒 ) "

               그러자 전군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 할것을 맹세 했다

               이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 돌아 왔다.

 

           훈구파의 탄핵으로 결국 逆鱗 를 건드리고......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궁지에 몰린 훈구파에게 반발을 샀고, 특히나  남곤, 심정, 홍경주는

          조광조를  음해하여  <走肖爲王> 이라는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글짜를 써 넣어 벌레가

          갉아먹게하여  왕에게  의심을 받게하고,  중종 역시도 급진적인 개혁에 염증을 느껴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어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 갔다가  그 해 12월에 賜死  되고만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며  결국  중종의  역린(註)을 건드리게 된 셈이다

 

           註 :  역린 ㅡ 용의 목 근처에 나 있는 비늘로  거꾸로 나 있으며 길이가 30 cm 나 되며 

                       이를  건드리면  성을 내어 건드린 사람을 죽여 버린다는  전설에서 유래 된 말.

 

           후세에  조광조는 

 

         그의  숭고하고  혁신적인 개혁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

         사후에 그의 도학정신은  이황, 이이 등의 유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고

         후세에게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고  성리학을  완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다.

 

 

         역사의  인물 중에 이렇게 개혁을 하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  어찌  정암뿐이랴

         그런데  우리 민족은  예나 지금이나  타인을 시기하고  중상모략하려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  이것을  버리는 날에는  대한민국은  지상 낙원이 되리라 믿어진다.

 

 

                                     안개가 끼고, 봄을 재촉하는 비를 보면서 ......

             

                                          2009.   3.  5 .  경칩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