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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충청도

광덕산을 올라 조선 여류시인인 운초 김부용묘를 참배하게 된다










"   광덕산을 올라 조선 여류시인인 雲楚  金芙蓉 묘를

참배하게 된다   "

(  2017.  1.  18.  수  )



계룡산 장군봉을 오르고는 2주만에 산을 찾게 된다

요즘은 일이 있어 산행도, 나들이도 자주 못하게 된다

산은 늘 나를 손짓하게 되고, 자연을 접하고 싶고, 미답지를 찾고 싶은데 ......

오늘은 천안에 있는 광덕산(廣德山, 699m)을 찾아가게 된다

몇 차례 오른 산이지만 그 곳을 택한것은 조선 3대여류시인의

한 사람인 운초 김부용묘를 찾아 가고픈 생각에서다

오래전에 광덕산 첨 왔을적에 잠시 들려 그 후에 운초를 알게 되었고

내심 존경과 연민의 情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광덕산 산행도 목적이지만 그보다 운초 김부용여류시인의 넋을

조금이라도 기리기 위함이요 참배하고픈 충동에서다


날씨는 미세먼지가 심각할 정도로 온 세상이 뿌옇다

그러나 광덕산을 오르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 산행코스 :  광덕사 - 팔각정 - 헬기장 - 정상 - 장군바위 - 김부용묘 - 광덕사

( 약9km, 4시간30분 )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는 광덕사의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일주문 현판에는 泰華山廣德寺라 해 두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의 경계에 있는 산


광덕산(廣德山)은 높이 약 699m로 천안 시가지를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한다. 천안시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천안시 동남구 동면 광덕리에도 같은 이름의 산[245m]이 있다. 광덕산을 기준으로 하여 북동쪽에서부터 태학산, 망경산과 함께 연속적인 산지의 양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지는 천안시와 아산시의 남서쪽 행정 경계를 이룬다. 광덕산 남서쪽에 자리 잡은 곡저(谷底)[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일대]에서 풍서천이 발원하고, 광덕산에서 동쪽으로 4.3㎞ 떨어진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 일대에서 동남구 광덕면 지장리에서 발원한 지장천과 합류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곡교천과 합류한다 ( 천안향토문화백과 )






광덕사 사찰을 가로 질러 산행 코스로 오르게 된다

겨울이라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등로 주변에는 잔설이 많이 보인다

계곡쪽으로 가니 장군바위로 오르는 길과 팔각정으로 오르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나는 팔각정으로 해서 정상으로 올라 갈양으로 그 코스를 택하게 된다

나무계단이 가파른 모습으로 우릴 맞이한다

계단숫자는 모두 568개이다

땀이 날 정도로 오르고 보니 마지막 계단에 표시 해둔 숫자로 갯수를 알게 된다 ㅎㅎ






팔각정에 이르게 된다

잠시 쉬게 된다

그곳 詩碑엔 시 대신 노산 이은상선생의

" 산악인의 선서 "  文이 있었다


"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 할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 되어야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다름이다  "


선서문은 익히 알지만 과연 무궁한 세계를 탐색하는지?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포기 하지 않는지 ?

무엇보다 대 자연에 동화하면서 살아 가는지?

나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면서 쓴 웃음을 지우게 된다





평일인데도 이 주변에서는 광덕산이 높고 좋은산인지라

산객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등로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아이젠을 신을 정도는 아니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나무계단 아니면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가뿐 숨을 내 쉬면서 오르기에 여념이 없다

미세먼지가 많아 주변은 모두가 뿌옇게 만 보인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공해가 심하니 앞으로의 환경이 걱정 스럽다












드뎌 정상에 이르게 된다

광덕사에서 불과 2.3km인데도 1시간30분이 소요 되었다

북으로 아산시가 보일것이고 망경산이 보일텐데

오늘은 잿빛 하늘이요, 탁한 공기로 인해 조망감은 제로이다



















이제 하산길에 접어 든다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콧등과 귀를 시리게 한다

잔설이 더욱 많은 등로는 주의를 요하지만 걷는되는 별 문제는 아니다

능선길을 가다 운초 김부용 묘를 들릴것을 생각하니 걸음이 빨라진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거대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군바위이다

웅장한 모습이 장군의 기품인듯 해서 붙여진 것 같다

바로 내려가면 광덕사가 나오지만 나의 뇌리는 운초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만이 .......



















오르내리기를 여러 차례 갖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험하지 않는 등로이기에 힐링이 절로 된다

조망감이나 스릴감은 없어도 힐링이 되는것이 土山의 특징이다 

산은 적막하기 이를데 없었다

오늘은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들리는것은 오로지 일행의 발자국 소리와 거센 숨소리뿐이다

혹 만나는 산객과의 눈 맞춤과 수고스러움에 인사로 건네는 말뿐이다

온통 무채색으로 변해있는 산야는 언제 봄이 되어 새롭게 유채색으로 탈 바꿈 할련지





이제 능선길이 거의 끝나고 보고자 하는 운초 묘는 길을 잘못 들어

광덕사까지 갔다가 다시 1km를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알바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르게 되니

드뎌 운초 김부용묘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3대 여류시인 (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 김부용 묘에 이르게 된다

묘지 바로 앞에는 이런 글이


" 운초 김부용 묘

조선조 순조조(1820~1869, 49세)  평양감사였던 봉주하 김이양대감의

소실로써 초당마마라고 불리웠음 

조선 3대 여류시인중 한분이며 五江樓문집등에 한시 350여수 남김

김대감과 사별후 정절을 지키며 살다 유언에 따라 그의 묘 근처인 이곳에 묻힘

1974년 묘를 찾은후 매년 4월말 천안문화원 주체로 천안문인회, 천안향토사연구소

천안차인회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추모행사를 갖고 있음  "


그 안내문을 읽고는 묘역으로 올라서게 된다

묘는 단아하게 원으로 된 도래석으로 단장 되어 있고 작은 비석이 좌측에 있었다

묘역은 잘 다듬어져 앞이 넓고 금강송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초라한 묘 한 기가 있었다

혹 김이양 평안감사의 묘인지 ....... 운초의 유언대로면 맞는것이 아닌가


묘 앞에서 합장을 하고는 한동안 묵례를 하게 된다

큰 절이라도 하고픈 생각이였다

자그마한 묘비를 유심히 보게된다

그곳에는  정비석(鄭飛石)선생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 雲楚 金芙蓉은 正祖때 평안도 成川땅에서 빈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四書三經에 通하고 詩文과 歌舞에 남달리 能했다

부모를 일찌기 여의어 부득이 기생이 되었으나 名妓中에 명기였다

平安監司 金履陽의 총애를 받아 그의 副室이 되었고 夫君이 상경하여

判書奉朝賀의 벼슬을 역임하는 동안 婦道를 알뜰히 지켜 內助의 功이 컷던 탓으로

草堂마마의 존칭을 받았다  김대감 사별후에는 절개를 굳게 지켜왔다가

임종시의 유언에 의하여 부군의 고향인 천안 광덕 이곳에 묻히다

저서로는 雲楚詩集과 五江樓文集이 있다

한인문인협회 천안지부 후원.  정비석 지음  "


비문을 흝어 본 후에 주변을 다시 보고는 이제 묘역을 떠나게 된다





묘역을 떠나면서 운초 김부용의 생애와 님의 유명한 보탑시 <부용상사곡>을 연상 해본다



 

『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 이겠습니까 ?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 입니다  』

 

 

 

김부용 무덤과 바로 뒤에 김이양대감의 묘를 보니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어한 김부용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부용 묘소 바로 뒤 약 10m에 김이양 묘소가 있슴)

 

그녀의 고향은 평안도 성천, 시명(詩名)은 운초(雲楚). 이름은 김부용(金芙蓉)이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운초 김부용을

조선 시대를 통털어 시 잘 짓고 노래 잘하는 조선의 3대 명기라고 칭한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멋진말은 조선시대 순조임금때 1820년~1869년까지 한 세상을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容)이 남긴 말이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열아홉살이 되었을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김부용의 인생의 전부에는 김이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그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성천부사로 부임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그때 김부용이 지었다는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 註 : 보탑시 ㅡ 글자로 탑을 쌓듯이 쓰는 詩 ) 

 

 



[부용상사곡]

 

운초(雲楚) / 김부용(金芙容)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얼마나 애절한 부용상사곡인가

퇴계 이황선생과 두향과의 사랑도 이와 같아 늘 흠모하게 된다

 

























운초 김부용묘에서 내려와 광덕사를 탐방하게 된다

천년고찰 광덕사는 여러채의 전각이 있었다






광덕사(廣德寺)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광덕사(廣德寺)는 ‘태화산 광덕사’로도 불린다. 백제 시기 사찰로 추정되는데, 신라의 자장(慈藏) 율사가 당(唐)에서 수행을 마치고 634년에 귀국할 때 진신 사리 10과, 법의, 화엄경, 불치(不齒) 등 많은 불구(佛具)를 가지고 와 광덕사에 전해 주었다. 그 후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진산(珍山) 화상이 중창하였다. 광덕사의 사적기에 따르면, 개창하던 당시에 금당 9, 종루 8, 범각 2층, 법전 3층, 동남방에 천불전, 그 곁에 만장각 80여 칸, 북에는 환희암, 동에는 은수암·수월암, 서쪽에는 문수대 아래 한산사, 또 대상(臺上)에는 보현암·영선암·금선암·사자암·하선암·선정암·봉두암·영수암 등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충청도와 경기 일대의 가장 큰 사찰이었으며, 총 본사였다고 한다.

그 후 1334년(고려 충혜왕 5)에 삼중창(三重創)을 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598년(선조 31)에 승려 희묵(熙默)이 법당을 복원하였으며, 1665년(효종 6)에 석심(釋心) 화상이 불상을 재조하였다. 1872년 4월 초에 중창된 것을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승려 지공 철웅이 11년간의 개축 불사를 하였다.

1998년 12월 고색이 창연한 천불전이 소실되어 2009년 9월에 복원하였다 ( 천안향토문화백과에서 발췌 )



광덕사 대웅전 (문화재자료 제246호)

현재의 광덕사 대웅전은 1872년(고종9년)에 중건 하였던것을

1983년에 해체하고 전의 모습으로 재현 한것임

전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다포계통식 건물이다




광덕사3층석탑 ( 유형문화재 제120호 )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초기에 세워진것으로 추정 됨





광덕사 석사자(문화재자료 제252호)

대웅전 정면 계단 앞 좌우에 1구식 서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것으로 추정 됨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 천연기념물 제398호 )

이 호두나무는 수령이 약400살(1988년지정)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8.2m이며 지상60cm에서 두줄기로 갈라져 있다

이곳을 호두나무 시배지(처음심은곳)라 한다


























적막하기 이를데 없는 산사는 고즈넉하기도 했다

여러 전각을 둘려 보고는 봄에 벚꽃이 만개 할적에 다시 올것을 다짐하면서

일주문을 나서게 된다

이로써 산행을 마치게 된다






광덕산을 산행하면서 보고팠던 운초 김부용 묘를 참배하고 나니

다시금 보탑시인 <부용상사곡>을 연상하게 되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은 순수한 아가페적 사랑을 퇴계선생이 두향을 사랑했듯이

운초 김부용도 나이를 초월해서 김이양 평안감사를 사랑한 사랑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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